본문 바로가기

생활 정보

3·15 의거

728x90
320x100

 

요약 : 1960년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3·15 부정선거에 반발하여 마산에서 일어난 대규모 시위로,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사건이다. 4월 11일 시위 중 실종된 김주열 학생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 앞바다에서 시신으로 발견되면서 2차 시위로 이어졌고, 이후 부정선거 규탄시위가 전국 단위로 확산되면서 4·19 혁명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의거의 배경

이승만 자유당 정부는 1960년 3월 15일 치러진 정·부통령 선거에서 장기집권을 위해 선거 준비 과정에서부터 노골적인 부정행위를 저질렀다. 이에 선거 준비 과정 중인 2월 28일, 대구에서는 학생들의 첫 시위(2·28 시위)가 발생하게 된다. 당시 대구에서는 민주당 유세날에 학생들이 유세에 참가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일요일에도 고등학생들을 등교하게 하였다. 이에 반발한 학생들은 정부의 불법적 선거 개입을 비판하는 시위를 일으키게 된다.

그러다가 3월 15일 선거 당일 자유당 정권은 사전 투표, 3인조·9인조 공개투표, 투표함 바꿔치기 등 온갖 부정행위를 저질렀다. 이러한 부정행위 결과로 개표 과정에서 부통령 이기붕의 표가 100%에 육박하는 결과가 나오면서, 이를 79%로 하향 조정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처럼 공공연한 부정행위가 목격되자 마산 시민들은 '협잡선거 물리쳐라'는 구호를 외치며 항의하기 시작했다.

320x100

시위의 전개

3월 15일 자유당 정권의 투표 부정에 반발한 학생과 시민들이 시위에 나서자, 경찰은 최루탄 및 총기로 무차별 발포를 가하면서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게 되었다. 여기에 정부는 이 시위를 공산당이 배후에서 조종한 좌익 폭동이라고 발표, 마산 시민들의 반발을 고조시켰다. 

그러다 4월 11일, 28일 동안 실종되었던 김주열 학생의 시체가 마산 중앙부두에서 떠오르자, 이에 분노한 마산시민의 2차 시위가 발발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산 의거를 도화선으로,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이처럼 전 국민적 분노로 확대되면서 시위 목적도 부정선거 무효뿐만 아니라 이승만 정권의 퇴진 자체를 요구하게 되었다. 

320x100

4·19 혁명으로 이어지다

부정선거 무효와 이승만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전국적인 시위는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시위에 이어 4월 19일 학생들과 일반 시민들이 가세한 대규모 시위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에 경찰은 또다시 무차별 발포에 나섰고, 이 과정에서 100여 명이 사망하였다. 여기에 이승만 정부는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지만 이러한 압박에도 시민들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4월 25일 대학교수들의 시국 선언문 발표 등이 이어지자, 결국 이승만은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하와이로 망명하게 되었으며 자유당 정권도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3·15 의거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300x250

'생활 정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라별 결혼 문화  (0) 2024.03.19
상활별 일본어  (0) 2024.03.16
화이트데이 유래 & 디저트 종류  (2) 2024.03.14
인도 계급  (0) 2024.03.10
닭 부위 별 요리  (0) 2024.03.09